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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따윤 2024. 10. 29. 03:29

 

해외에 살면 한글로 된 책 읽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토론토나 벤쿠버같이 한국인이 많이 사는 대도시라면 배송 시스템도 잘 되어있고 어느정도 적절한 가격선에서 한국 책을 배송받아 읽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소도시에 사는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간편하게 책을 읽을수 있는 방법은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는 것 뿐인데, 마침 한국에 살 때 지역 전자도서관에 가입해 놓았던 아이디가 아직도 살아 있어서 유용하게 쓰곤 한다. 

 

하여간에 예약끝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하루키 소설은 상실의 시대, 1Q84이후로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육아하는 와중에도 짬짬히 읽어서 한 4일만에 독파한듯 하다. 작가의 최근작이라 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쭉쭉 읽혀 나갔다. 

 

1장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한 첫사랑 소녀의 이야기였다. 둘은 둘만이 서로를 이해하는 글쓰기라는 취미로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데.. 남자로서 이미 빠져들기 충분한 설정이었다. 소녀는 뭔가 꿈을 기록하기를 좋아하고 공상을 통해 하나의 가상 세계인 '도시'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주인공도 이에 거들어 둘만의 도시를 상상 속에서 꾸며내기 시작하고, 점점 디테일을 덧붙여가면서 거대한 가상의 도시를 만들어 낸다. 소녀는 언젠가 그 도시에서 만나자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곤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1장에서는 과거(소녀와 교제하며 도시를 상상하던 시절) 과 현재(주인공이 도시에 들어와 거주하는 시점) 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주인공이 실제로 도시에서 생활하며 그 소녀 - 주인공을 기억하진 못하는 - 와 함께 도서관에서 '꿈 읽기'라는 활동을 하다가, 자기 그림자의 설득에 넘어가 그림자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도와주다 끝난다.

 

(1장의 마무리가 뭔가 단편소설 하나가 끝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후에 작가의 글을 읽어 보니 1장 이후에 2장,3장을 덧붙인 거라고 한다.)

 

2장은 도시를 빠져나온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분명 도시를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왜인지 주인공의 몸은 도시를 빠져나와 있었고, 도시에 남기를 원했던 주인공은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살아가다가 뭔가를 느끼고 '도서관'에서의 재취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즉 2장은 주인공의 도서관장으로서의 재취업기 및 업무 적응기..인데.

 

2장의 별것 아닌것 같은 얘기가 엄청 재미있다. 취업할 도서관을 찾아내고..면접을 보고.. 새로 업무에 적응하고. 이때 중요한 인물이 바로 전임 도서관장인 고야쓰인데, 주인공에게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주인공의 과거 여자친구와의 일과 도시 안에서 벌어졌던 일, 그리고 도시에서 쫓겨나온 일 등등..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야쓰 역시 한번 그림자를 잃었던 인물이고, 과거의 주인공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다. 고야쓰는 머지않아 주인공을 떠나게 되지만 주인공은 점점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나서 또 만나게 되는 몇몇 주변인물들-카페 사장 및 옐로 파커 소년 등등-과 이야기가 전개되며 결국 1장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이 도시의 벽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밝혀진다. 

 

3장은 아주 짧은, 도시 안에서의 마지막 얘기이다. 사실 2장에서 도시 바깥으로 나오길 원하지 않았는데 나왔다고 착각한 주인공은 바로 주인공의 그림자였던 것이고, 실제 주인공은 도시 안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가, 옐로파카 소년의 등장으로 다시 도시 바깥으로 나가 그림자와 다시 합쳐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정-반-합 구조가 아닐까?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루 말할수 없는 많은 상징들과 비유들로 소설을 가득 채워놨고 나는 그 반도 이해를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내용을 굉장히 술술 읽히고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필력이 대단한 것만 같다. 

 

내용적으로 따져보면 누구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자기만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떨어져 나갔던 그림자와 합쳐지는 것 같이 그 첫사랑의 열병과 상처를 극복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