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생활

한국 직장생활 1: 달콤쌉쓰름한 첫 사회생활의 추억

따윤 2024. 2. 12. 06:18

을지로 입구역에 있는 우리 회사 옛 건물

 
나는 첫 직장에서 거의 10년을 보냈다. 그래서 인생의 꽤 많은 부분을 한 회사에서 지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10년이라는 과정 동안 한 회사에서 무려 5팀에 이르는 많은 팀들을 전전했다. 단순 업무만 달라지는 게 아닌 업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여러 팀을 전전해서 마치 다른 회사를 다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회사가 체계가 잡혀 있는 대기업이었기에 저변에 깔려있는 문화와 의식 수준은 비슷했지만 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업무 처리 방식과 사람들과의 교류는 흥미롭고 오랜 회사생활동안 활력을 주기도 하고 좌절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가진 것은 어떻게 보면 무기이고 축복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제대로 된 전문 업무역량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기들은 10년차 과장급으로 쭉쭉 올라가는 동안 나는 한 팀에서 3년 이상을 보낸 적이 없으니 한 팀의 제대로 된 시니어 멤버로 성장할 기회가 없었다. 이는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큰 요인이 되었다. 


첫 번째 팀은 토목설계팀이었다. 학부를 토목과를 나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첫 팀으로 배정되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첫 팀의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5명~20명 정도 되는 팀이었는데 사람들도 너무 좋았고, 1년차이 2년차이 나는 선배들도 많아서 편하게 물어볼 사람도 많고 가르쳐 줄 사람도 많았다.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과장/부장님들은 조금 대하기 어려웠지만 막 심하게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 내 나이정도 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너무 심하게 어려워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일도 많지도 않았다. 원래 1년차는 배우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나한테 떨어지는 업무는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볼 때도 팀 자체에 일이 과중하다는 생각은 많이 들지 않았다.

근태관리도 느슨했던 걸로 기억한다. 점심 먹고 커피 마시고 띵까띵까 하기도 하다가 한 30분 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아침에도 9시가 좀 넘어도 커피 들고 들어오면 아 커피 사느라 늦었나보다 하는 정도였다.
 
회사 차원에서 동아리 같은 것도 있고 지원도 많이 나와서 업무 외적으로도 지원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침 회사가 수주도 많이 하고 일거리가 많이 돈이 잘 들어오는 때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 수영 동아리를 했는데, 명동에 위치한 YWCA? 수영장에 한 달에 한 번씩 업무 후에 가서 수영을 했고, 수영이 끝나면 필수적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을지로입구 쪽 명동 노른자 땅에 있는 아르누보 오피스텔 건물에 술집이랑 식당이 진짜 많아서 애용했다. 그리고 명동 골목 구석 구석에도 고참들만 아는 노포들이 많아서, 진짜 일주일에 2번 이상은 거의 회식을 다양하게 했던 것 같다. 

명동 먹자골목의 거의 모든 가게를 들렀던 것 같다. (https://m.blog.naver.com/jiniezi/222894809504)

 
우리 기수가 입사할 때가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인원의 신입사원을 뽑았다고 들었다. 거의 200명 이상의 인원이 한 번에 들어왔다. 그래서 모든 동기를 다 기억할 수도 없었고 어느 팀에 연락해도 동기가 있어 타팀과 업무 협조가 굉장히 수월했다. 동기들 간에 사이도 좋아서 다들 젊고 결혼도 안했을 1~2년차때는 맨날 업무 이후 자주 모임이 있곤 했다. 마침 회사 위치도 명동 먹자골목 인근이었기 때문에 놀거리도 천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즐거운 시기였다. 

우리의 생과일 주스를 책임졌던 더컵..해장으로 항상 토마토쥬스를 사먹었던 기억이..지금은 간판은 있지만 망한 것 같다.

 
조금 오래되어서 가물가물 하기도 하고 기억이 미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적으로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주로 발전소에 들어가는 토목 구조물을 설계하는 일을 했는데, 설계라고는 하지만 주로 하청업체에 지시하고, 기본을 가져오면 규정에 맞춰 설계했는지 검토하고, 계산하고 하는 일을 했다. 가끔은 직접 구조물 디자인도 하기도 했다. 학부 때 배웠던 지식들을 실제로 써먹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일 자체로서는 꽤 흥미롭게 배우고 일했던 것 같다. AutoCAD를 비롯해 여러 해석/디자인 프로그램들을 새로 배울 기회도 많았다. 
 
회사 분위기가 살짝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은 2년차에서 3년차를 넘어가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2014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플랜트 경기가 워낙 왔다갔다 했었고 회사에 많은 부분이 플랜트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적 또한 왔다갔다 했다.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경영적으로 일선 팀에 압박이 들어왔다. 근태를 좀 더 확실하게 따지고, 업무시간에 자리를 이탈하는 시간을 제한했다. 지정된 시간 외에 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람에 대해 주중 보고서가 직책자에게 통보됐다.

또한 아침에 강제적으로 30분을 일찍 출근하게 해 회사의 사상이나 미션 등을 복습하고 또 외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걸로 시험도 보고, 고과에도 반영했다. 직책자들도 이런 걸로 위에서 판단하는 팀의 성과가 달라지니 꽤 예민하게 반응하고 지시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북한 저리가라 할 '정신교육' 이었지만 그때는 다들 회사의 어려움을 함께 감내한다는 기분으로 참여했다. 게다가 별다른 도리도 없지 않은가. 까라면 까야지. 
 
게다가 연일 계속되는 회식도 고역이었다. 애초에 술을 잘 마시는 편도 아니고 윗사람들이랑 마시는 자리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성격인데,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를 윗사람의 강권으로 연거푸 마셔야 할 때는 참 힘들었다. 가끔은 일이 바빠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저녁을 먹고(거기에 술도 곁들여서) 다시 들어와서 야근을 한 적도 있었다.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일이 바쁘면 빨리 마치고 나서 일찍 집에 가야 하는게 맞지 않나? 

 

회식자리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선배들의 주정도 견디기 힘들었다. 술을 적당히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술만 마시면 때때로 본성이 드러나거나 후배들에게 실수를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때로는 강압적이고 나는 아니었지만 손찌검을 당한 동기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회사생활에 환멸이 쌓이고 있었다. 
 
이 때부터 신입사원이었을 때의 그 아무것도 모르는 즐거움은 조금씩 사라지고 회사의 부조리와 정치,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이 합쳐진 진짜 사회생활이라는 게 뭔지 조금씩 고민하게 되었다. 일은 그냥저냥 할 만했지만 뭔가 미래가 그려지진 않았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니 자의든 타의든 그만두시는 선배들이 보였다. 여기서도 정치를 잘 해서 목숨을 오래 연명하지 않는 한 언제 그만두게 될 지 모르는 사회였다. 그리고 팀 내에 알게 모르게 있는 군대 문화와 거기에서 갑갑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군대는 2년이라는 시간제한이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기약이 없었다. 이렇게 (정치라도 잘 해야) 60살, 아니 70살까지 살아야 한다고?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 오곤 했다. 아직 젊은 것만 같은데 다른 일도 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