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생활

한국 직장생활 4 : 또다른 갈림길

따윤 2024. 2. 23. 12:28

일이 점점 손에 익어가면서 두 번째 팀에서의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다. 컴퓨터 전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그래밍과 DB구조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는 좌절감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구글링도 하고 어깨 너머로 코딩도 배우면서 어떻게든 극복하곤 했다. 가끔가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는 성취감도 들었고 어떨 때는 토목보다 적성에 잘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재밌는 동시에 또다른 걱정거리도 생겼다. 이 업무능력을 활용할 업계가 좁아도 너무 좁다는 게 문제였다. 프로그램 자체가 너무도 유니크하고 국내에서 플랜트 업계의 대형 건설사에서밖에 쓰지 않는 솔루션이었기 때문에, 같은 솔루션을 다루는 업계 사람들끼리는 이미 다 아는 사이였다. 나 역시 가끔씩 업계 모임이다 세미나다 해서 만났지만 내 솔루션을 다루는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세미나에서..

 

게다가 솔루션에 사람이 많이 붙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회사당 필요 인원은 1-2명이 전부..국내에서 다루는 사람은 극소수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서 이 회사를 나간다고 쳐도 갈만한 곳은 경쟁사 혹은 솔루션을 서비스하는 회사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 전공이 컴공이 아니고 프로그램마져 어깨 너머로 배운 나는 당연히 순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사 안에서야 공채고 출신대학도 좋았기 때문에 이 팀에서 데려왔지만 회사 울타리 밖을 나가면 찬밥 신세가 될 것은 뻔할 뻔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루는 사람도 많이 필요하고 타 회사로 이직도 자유로웠다 다른 메이져 솔루션 (프로세스나 3D 솔루션)에 비해 비인기 솔루션인 내 프로그램을 회사 안에서 쓰기는 써야 하는데, 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던져준 느낌도 있었다. 

 

물론 그냥 이 회사와 이 팀에 뼈를 묻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 때도 굳게 가지고 있던 생각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였다. 아직 젊기도 했고, 한 회사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다는 것은 당시 부양할 가족도 없던 젊은 혈기에는 당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승진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던 회사 내의 불합리한 정치질이었다. 결국 과장 부장 직책자가 되려면 어느 정도..아니 필수적으로 정치력이 필요했고 - 이른바 사바사바 - 나는 그런 불합리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직책자나 임원에 앉은 사람일수록 고지식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았으며, 불합리가 합리인 줄 알고 아랫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꼽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사가 그런 사람들을 중용했다. 이 팀으로 옮긴 이후 팀 내 능력자들이 더 나은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나는 절대로 저렇게 이직은 힘들겠다' 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직책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당장 어떤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화를 꾀하기는 더욱 어려울 터였다. 싫다고 뛰쳐나온 토목팀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그러던 중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왔다. 평소 회사에서 진행하는 사회공헌활동에 자주 참가하는 편이었다. 대학생 때 봉사활동 동아리를 하기도 해서 관심이 있었고, 봉사활동이라고 해봤자 벽화 그리기나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하기 같이 쉽고 재밌는 것들이라 부담도 없었다.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강제 활동을 빼고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는 시간만 되면 거의 모든 활동을 참여했다. 

연말 봉사이벤트 게스트로 찾아왔던 에이프릴

 

가끔은 봉사활동 후에 활동을 기획한 직원분과 얘기를 나누곤 해서 안면 정도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다가 한 활동 후에 재밌었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이렇게 왔다. 

항상 봉사활동 열심히 참여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곧 다른 회사로 떠나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사회공헌 담당자 해 볼 생각 없나요? 지금 제 후임을 구해야 하는데, 사외 채용보다는 사내채용을 우선 고려하고 있거든요. 봉사에 관심도 많고 참여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눈에 띄었었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알려 주세요. 제가 저희 팀장님 만나뵙고 말씀 나눌수 있게 자리 마련해 볼게요. ^^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긴 했고 좋아라 하기도 했지만..전사 사회공헌 담당자라니. 당시 있던 팀에서 거의 2년을 다 채워 가던 시점이었다. 

 

고민이 많아졌다. 사회공헌 기획과 운영은 대학교 때 사회공헌 동아리에 거의 뼈를 묻을 만큼 활동했기 때문에 자신도 있었고 잘 하는 일이긴 했다. 그리고 대학과는 다르게 운영될 사기업 사회공헌활동 기획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순수한 관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번 팀 이동은 이전 이동과는 커리어에 미치는 파급력이 달랐다. 첫 번째 팀인 설계팀과 지금 있는 시스템 관리팀은 '실제로'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팀이다. 사회공헌은 당시 홍보팀이 담당했고 이 팀은 회사 사업부가 아닌 전사 서포팅 팀(우리 회사에서는 S부문이라고 불렀다.)이었다. 이번에 가야할 길 - 기업사회공헌 담당 - 은 미래 이직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가능성 줄어들 것처럼 보였다.

 

또 지금까지 어렵게 배워 놓은 프로그램과 DB 지식이 아깝기도 했다. 이제야 좀 일이 손에 잡히고 1인분을 하게 됐는데...근데 또 막상 그렇다고 현재 프로그램의 전문가가 된다고 또 무슨 길이 보이는 것도 또 아니었다. 어디로 이직을 할 수 있는것도 아니었고. 

 

일 주일 정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같은 팀 동기들과도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어렵게 결정을 내리고 답장을 보냈다.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면접은 언제쯤 보러 가면 될까요?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똑같다면 해보고 싶은거 다 해보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회사에서의 제 3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