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 시기는 직장인들의 '퇴사 붐' 이 한창인 시기기도 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은 삼성을 퇴사하고 '퇴사학교' 라는 것을 설립하기도 했다. 직장에서 제대로 된 이상을 실현 못하고 자괴감만 들어가던 사람들이 퇴사를 하고, 퇴사 성공 수기 같은 것들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이 시기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퇴사와 더불어 세계여행이 또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아예 몇 년동안 세계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다니기도 했고.. 2년차때인가 이 녀석을 만나서 여행하러 스페인에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은 MZ들의 '조용한 퇴사' 가 또 다른 트렌드인 시점이지만..이 때는 MZ라는 말도 없었다. 이런 저런 퇴사와 여행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계속 접하면서, 맘에 안 드는 직업은 때려치고 뭔가 어떻게든 퇴사하고 꿈을 좇는 것만이 낭만이 있고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이 스믈스믈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의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의 그 기쁨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3년차 때부터 아래 생각이 머리에 꽂힌 후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기 시작했다.
이 직장은 나랑 맞지 않네..나는 퇴사 후 남미 여행을 갈 거야!
뭘 해도 퇴사 생각 뿐. 심지어는 본격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학원을 등록하기도 하고 사이버 외대를 등록하기도 했다. 나름 여행에 대한 준비는 시작했었다. 여행 갔다와서 뭘 할지는 아직 못 정했었지만. 그때는 별로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도 없었고, 월급을 어떻게 쓰고 모아야 하는지 경제적인 관념도 없었다. 집안 사정이 그닥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퇴사는 더욱 안될 말이었지만 뭔가 반항하는 느낌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집에다가도 퇴사를 한다고 통보했었다. 다녀와서는 그냥 다른 아무 공기업이나 취직하겠다고 했다. 취직할 당시에 너무 쉽게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재취업도 문제 없을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딜 가도 여기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일이었다.
당연히 집안의 반대가 있었고 제대로 된 계획이 없던 나는 크게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좀 해보면서 당시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던 과장님께 상담요청을 했다. 별로 개인적으로 친한 분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고민도 털어놓게 되었다. 과장님께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하자마자 '너 퇴사하냐?' 가 나왔다. 과장님이 연초를 피우셔서 같이 담배피는 곳으로 가서 길게 얘기를 했다.
"대체 나가서 뭐 할려고?"
"(여행 좀 다녀와서) 그냥 공기업 좀 들어가려고요."
"공기업은 아무나 붙여 준대냐? 거기는 왜 가려고 하는데?"
"그냥 이 회사랑 잘 안 맞는거 같아요."
"그러지 말고 지금 내가 팀장님한테 잘 말해줄 테니까 어디 회사 내에서 가고싶은 팀 있으면 말해봐. 혹시 다른 팀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잖아?"
퇴사 후에 제대로 된 계획도 없었던 나는 이 제안에도 역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팀장님께 따로 말씀까지 해 주신다는데 거절하기도 그랬고,, 이참에 아예 다른 팀에 한번 갔다가 거기서도 퇴사하고 싶으면 그때 하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며칠 후에, 팀장님께서 따로 호출하셨다. 과장님한테 얘기 들었다며 최근 팀간 인적 교류가 있으니 어디 가고싶은 팀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에 아예 설계와 관련없는 팀을 가고 싶어서, 관심이 있던 코딩이나 컴퓨터 쪽을 다루는 팀을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마침 회사 내 플랜트 프로그램 관리를 하는 팀에서 인원 충원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밑져야 본전, 따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한번 그 팀으로 가보겠다고 했다.
입사한지 3년 3개월, 설계팀에서 일한지는 딱 3년이 되던 달에 팀 이동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팀이었고 좋은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 지금도 팀 동기들은 계속 연락하는 제일 친한 친구들이고, 선배들도 퇴사 할 때 따로 다 인사를 드릴 만큼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첫 사회생활의 매운 맛도 느꼈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팀에서 시작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한 것 같다. 그렇게 정든 토건설계팀에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팀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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