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인계받은 사내 사회공헌활동을 정신없이 진행하면서 점점 업무가 익숙해졌다. 이런저런 사회공헌활동이 많았지만 그 중 특별한 것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병원과 협업해서 베트남에서 안면 기형 아동들에게 무료 수술을 해주는 사업이었다. 주로 입술이 갈라져서 태어나는 애들을 위한 수술인데, 사업도 사업이었지만 매 년 베트남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물론 관광은 거의 못하고 거의 사업에만 몰두하다 왔어야 하긴 했지만 짬을 내서 반나절 정도는 시내 구경도 하고, 음식도 먹고 올 수 있었기 때문에 힘들긴 해도 즐거웠다.
또 다른 활동은 임직원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가종동반 봉사활동이었다. 연에 4번 정도 진행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일했던 활동이었다. 거의 매 번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 복지관과 함께 행사를 진행했다. 이 활동으로 하여금 직원들은 봉사도 함과 동시에 가족과의 즐거운 시간도 보낼 수 있어 특히 초-중등 아동을 둔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사회공헌 담당자로서 이 활동이 또 좋았던 점은 사내에 발이 넓어진다는 점이었다. 회사에 단 한 명 있는 담당자이기도 하고 일선 임직원들과 접점이 많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알고 연락하게 되는 직원들이 많아졌다.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먼저 봉사활동 즐거웠다고 소감을 전하려 연락을 주시기도 하고..이런저런 피드백을 주는 분도 있었다. 타 부서에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얼굴도 많이 팔리면서 책임감도 늘어났지만 그만큼 즐기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이 신나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힘든 것도 잊고 진행했던 봉사활동이었다.
그룹에 속해있는 회사의 담당자로서 또 좋았던 점은 그룹 내 다른 계열사 사회공헌 담당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다른 회사는 커녕 같은 회사 사람들도 팀 외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각종 세미나나 교류회 같은 것을 통해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은 어떤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들이 마련되었다. 다른 계열사 역시 나처럼 사내 채용되신 분들도 있었고, 아니면 정말 CSR활동을 전문으로 공부하신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공감대도 많이 형성할 수 있었고 CSR이 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고, 같은 계열사 직원들이니만큼 다들 호의적이었고 친절했다. 단언컨데 회사생활 중 가장 다이나믹하고 재밌게 일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홍보팀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여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팀장님이 조용히 부르시더니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네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이번에 사장님한테 지시가 하나 내려왔는데,, 사회공헌 업무가 우리 팀에서 업무지원팀으로 넘어갈 것 같다."
"네?? 언제요?"
"다음 달? 아마 거의 바로 넘어갈 것 같아."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너가 하나밖에 없는 담당자니까 같이 넘어가야 할 것 같애. 미안하게 됐다."
갑자기 떨어진 사장님의 팀 이동 지시.. 임원도 아니고 사장 지시이기 때문에 얄짤없었다. 업무지원팀은 회사에서 정말 일반적인 사항을 담당하는, 예를 들자면 식당이나 카페같은 부대시설 관리,표면적인 이유는 홍보팀은 홍보와 미디어 같은 전문 역역에 집중을 하고 사회공헌은 업무지원팀에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뭐 이런 거였는데. 솔직히 말하면 사내 정치적 이슈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홍보팀에서는 팀원 하나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팀을 옮겨야 하니 난감했고, 받아들이는 팀 입장에서도 담당자가 같이 딸려오긴 하지만 굳이 원치 않던 업무가 하나 늘어나게 된 셈이니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회공헌 업무가 중요해서 더 잘하는 팀에 넘기는 것도 아니고 10여년을 맡아오던 팀에서, 다른 업무에 집중하란답시고 갑자기 CSR의 C도 모르는 팀에 하루 아침에 넘겨지는 그림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공헌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업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 된다. 양 조직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다.
담당자인 내 입장에서도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업무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모시는 팀장과 임원이 달라지고 보고 라인이 변하면 그에 맞춰 보고를 해야 한다. 게다가 기껏 팀원들과 친해져 왔고 사이도 좋았는데, 이제 와서 강제로 팀을 옮겨서 또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났다. 팀원들도 다들 위로의 말을 전해주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래도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직생활을 하는 데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하루아침에 팀 이동 준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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