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생활

한국 직장생활 7: 뜻밖의 수확

따윤 2024. 3. 14. 07:05

그렇게 홍보팀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 업무지원팀으로 이팀하게 되었다. 내 업무가 변하는 건 없기 때문에 일적으로는 부담이 없었으나, 맡고 있던 업무를 위 팀장과 임원에게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다. 홍보팀에 처음 이직했을 때, 새 담당자로서 일을 배울 때도 고생을 했었다. 업무 히스토리 파악하고, 실제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혀야 하고, Lessons Learned 익혀야 하고.. 그런데 아예 새 조직에 내 업무를 들고 들어가는 일은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고생스러웠다. 마치 학생으로서 모르는 것을 공부할 때 어려운 것과, 선생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게 가르칠 때의 어려움이 다른 것과 같았다.

물론 어차피 업무야 담당자인 내가 한다. Easy going한 윗사람을 만날 경우, 또 평범한 업무라면 그 업무가 어떤 팀으로 가던지 이렇게 갈 수 도 있었다.'어차피 일은 네가 할 거고 네가 담당자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찐빠만 안 나게 해라'.  하지만  당시 내가 맡은 업무가 회사의 나름 주요 대외 업무중에 하나였고 C레벨에서의 판단이 많이 필요한 기업 CSR이었기 때문에 절대 저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새로운 담당 임원 입장에서는 대체 이 CSR 업무가 왜 생겼고 하는 이유가 뭐고 어떻게 하고 히스토리가 뭐고...이런 것들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 CEO 명으로 업무를 인수받은 만큼 '내가 인수받은 후에는 이런저런 식으로 보완, 발전시키겠다' 이런 식의 보고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CSR 업무에 대한 종합 보고를 위해서만 거의 이팀 후 한달 넘게 고생해서 보고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임원용 보고서 따로, CEO용보고서 따로..임원과의 끊임없는 미팅.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한 두번만에 모든 사회공헌활동의 내용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CSR 에 문외한인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대체 이 활동을 왜 해야 해?', '돈만 쓰고 대체 얻는 게 뭐야?', '우리나라도 어려운 사람들 많은데 왜 외국까지 나가서 도와줘야 하냐?', 궁극적으로 '대체 사회공헌활동이란 게 뭐냐?' 밑도 끝도 없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본질적이긴 한 질문들이 회의시간에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CSR활동은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결과를 수치료 나타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보고와 설득에 더욱 난항을 겪었다. 일반적인 기업활동이라면, '돈을 얼마를 투자를 해서 매출이 얼마가 나왔고 이익이 얼마가 발생했다', 이런 식으로 수치화를 통한 보고가 가능하나, 사회공헌활동은 단지 비용이 얼마가 들어갔는지만 수치화할 수 있을 뿐, 대체 그 활동이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 정량적으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이번 달에는 300만원을 어디에 기부했습니다.' 혹은 '이 활동은 500만원이 들어서 이런저런 임직원 활동을 했습니다.' 까지만 되는 거다. 그 결과는 항상 정성적일 수밖에 없다. '기부받은 이 아동은 그래서 어떤 체험활동을 할 수 있었고,, 어떤 혜택을 받았고,, 임직원들은 즐거웠고,, 혜택받은 아동은 어떤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고...'

네트워킹 자리에서 몇번 만나뵌 유승권 박사님의 말씀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CSR업무 외부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이러한 다소 황당하지만서도, 어떻게 보면 본질적인 질문들이었기에 항상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사회공헌 담당자로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부분이라던지 아니면 진짜 이게 사회공헌활동이 맞고 기업에 도움이 되는 건지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 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던 계기가 되는 질문들도 있었고 거기서 일부 활동은 보완을 하기도 했다.

또다른 새로운 전환점은 조직의 본질에 있었다. 홍보팀에서의 사회공헌활동은 기업 '홍보'에 집중을 했다. '이 특별한 활동을 하면 기사가 많이 날 거고.. 이 활동은 너무 진부해서 주목성이 떨어지고..' 등등. 그런데 업무지원팀은 업무의 본질이 임직원의 업무를 원활하게 돕는 것이니만큼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는 임직원에 집중을 했다. 어떤 활동은 임직원에게 더 많은 지원이 들어가야만 했고, 혹은 임직원 참여가 저조하거나 혹은 아예 불가능한 단순 기부업무 같은 것은 점차 그 중요도를 낮춰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천지개벽할 변화를 준 것은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주요 활동들은 조금씩 변화를 줄 지언정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전통과 역사가 있는 활동들을 하루아침에 뒤엎기는 쉽지 않았다. 담당자 입장에서도 '아 이 정도면 시대에 맞춰 변화를 줄 만 했다' 정도의 수준에서의 변모였기 때문에 엄청 어렵진 않았고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정말 어려웠던 것은 CEO보고까지 갈 때까지의 그 험난했던 보고서 작성 여정..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보고서 작성 스킬도 많이 늘었다. 그 전까지만 ppt를 예쁘게 꾸민다거나 보고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을 정말 시간낭비고 업무의 본질이 아니라 여겼었다. 그런데 한 보고서를 극한까지 갈고 닦다 보니 '보고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에 대해 그 개념이 바뀌게 되었다.

옛날에 신입사원 연수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 SK의 역사를 표현하는데, PPT에 큰 화살표를 넣고 화살표 위에 연도별 마일스톤을 표기하는 간단한 장표를 작성할 일이 있었다. 이 때 나는 약간 디자인 적인 요소를 접목시킨다고 화살표에 커브를 주었고, 그 화살표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화살표는 상승해야 한다


그런데 나중에 발표 후에, 담당 직원분이 이런 발전 과정에서 화살표가 위에서 아래로 가면 하강의 느낌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게 맞다고 지적을 했다. 당시에는 그 얘기를 듣고 '디자인적으로 예쁘기만 하면 되지 대체 화살표 방향이 무슨 큰 상관' 이라고 코웃음을 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백 번 맞다.  아래쪽으로 향하는 화살표는 부정적이고 쇠락하는 이미지를 줄 수 있고 그것은 피보고자의 무의식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외 PPT에 적합한 단어 선택과 단어 수. 색깔. 픽토그램. 적절한 그림. 보고서에서의 시선의 방향... 신경 쓸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보고를 잘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바꾼 것도 한 몫 했다. 보고를 '한 방에' 잘 끝내서 내가 담당자로서 하고 싶은 일을 잘 설득해야지만 두 번 보고를 안 하고 바로 원하는 실제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잘 만드는 것은 결국 피보고자가 아니고 담당자인 나를 위한 일이라고 마인드셋을 바꿨다. 그랬더니 보고가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아닌, 내가 하는 일을 누구라도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는 무기라고 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새 팀에서는 이렇게 논리로 무장된 보고(를 가장한 설득) 이라는 새로운 업무 스킬을 배우게 되었다. 이 능력은 비단 사회공헌활동에서만 쓰이지 않고, 향후 어떤 레포트나 보고서를 작성할 일이 있을 때 유용하게 쓰이게 된다. 그렇게 업무지원팀에서의 사회공헌활동은 점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는데..